부처님께 귀의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부대중이 다함께하는 제12교구 해인사 말사. 진주 월아산 청곡사

청곡사 문화 산책

도난당한 십대왕 동자상

청곡사 | 2018.06.22 03:16


2008.05.12/ 뉴시스


------------------------------------------------------------------------------------------------------------------------------


죽은 자 선악 기록하는 ‘동자상’도 훔쳐가

20구 동자상 도난 36년 만에 한 사립박물관장 수장고서 발견
시왕 도와주는 ‘목조동자상’, 아담한 체구 천진스러운 얼굴에
귀여운 신체 비례 가졌지만 작고 가벼워 인기 있는 절도 대상

사진1) 미황사 목조동자상, 조선 후기, 높이 57-61cm. 필자 제공.

해남 미황사 응진당에 도둑이 들었다. 그들은 1985년 1월2일 늦은 밤부터 1월3일 새벽 사이 목조동자상 20구를 훔쳐갔다. 그후 2001년 10월15일에 응진당 목조동자상 7구가 또 도난됐다. 이보다 몇 해 전인 1988년 2월6일에는 진주 청곡사 업경전 목조동자상 10구가 모두 도난됐다.

시왕의 시중을 드는 권속 가운데 하나인 목조동자상은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벼워 인기있는 도난 대상이었다. 그동안 행방을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 1월 모 경매시장에 출품 예정이었던 도난 불교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서울의 한 사립박물관장 은닉처에서 ‘미황사 동자상 7구’와 ‘청곡사 동자상 2구’가 발견돼 회수했다.

해남 미황사는 749년 신라 경덕왕 때 의조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우리나라 남쪽 땅 끝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과 연혁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기록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1530년), ‘미황사사적비’(1692년),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1754년) 등에 간략하게 나온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1597년 정유재란으로 전각이 소실된 후 1598년부터 1754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중창불사를 통해 지금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특히 조선 후기에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 주석하며 그 법맥을 이어갔고 현재 경내에 부도 27기와 탑비 5기가 남아 있다.

미황사 목조동자상은 응진당에 주존불인 목조석가불좌상과 함께 십육나한상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하나, 원 봉안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원래 동자는 도교에서 신선의 시중을 드는 시동(侍童)에서 유래됐으나 불교에 수용된 후 항상 인간 곁에 있으면서 죽은 자들의 선악행위를 명부(名簿)에 기록해 하늘에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동자상을 선악동자(善惡童子)라 부르기도 한다.

주로 어린 소년이나 소녀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권선징악적 상징성이 더욱 강조돼 동자상이 불교미술의 중요한 주제로 알려지면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다. 현존하는 동자상들은 대부분 사찰의 명부전에 안치됐던 상인데 각 시왕마다 1구씩 배치된 것이 아니라 10구 또는 12구인 경우도 있다. 머리 형태와 옷, 손에 쥐고 있는 지물도 각기 다르다. 형식이 다양하며 자유롭다.

명부 도상의 한 권속이자 죽은 자들의 죄업을 판결하는 시왕을 도와주는 존재인 동자상은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근엄한 불상과는 또다른 종교적 예배대상이다. 이런 동자상들은 복장물을 통해 봉안처나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예가 거의 없기에 회수 후에도 원 소장처를 모르는 경우가 제법 많다.

회수된 ‘미황사 동자상’ 7구의 높이는 57~61cm으로 거의 유사한 크기다. 다만 손 모양, 지물 종류, 착의법 등에서 약간씩 다르다(사진1). 또 도난된 이후로 얼굴에서 대좌까지 개채돼 원래의 모습에서 다소 변형됐다. 지물도 일부 잃어버렸다.

무릎을 약간 굽히고 서있는 자세로 머리카락은 틀어올려 양쪽으로 묶은 쌍계(雙髻) 형태를 하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합장하거나 홀, 연봉우리, 종 등을 들고 있다. 얼굴은 천진난만하며 신체 역시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다리는 짧아 어린아이와 같은 귀여운 모습이다.

옷은 소매가 좁거나 넓은 긴 도포를 입고 그 위에 넓은 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데 도포와 허리띠의 색깔이 달라 장식적인 효과를 준다. 몸을 휘감는 천의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동자상도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선재동자가 연상이 된다.
 

사진2) 동자상 대좌 바닥면. 필자 제공.
사진2) 동자상 대좌 바닥면. 필자 제공.

미황사 동자상의 대좌 바닥면에는 ‘右十’(우십), ‘右十一’(우십일), ‘左六’(좌육), ‘左九’(좌구), ‘左十’(좌십)이라는 묵서가 적혀 있다. 이 숫자는 봉안됐을 때 위치를 말해주는데 ‘左九’란 왼쪽에서 아홉번째 상이라는 의미다(사진2).

본래 미황사에는 44구의 동자상이 있었고 그중 27구가 도난됐다고 하는데, 동자상으로는 수량이 너무 많고 관련 자료가 없어 현재로서는 그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다. 미황사 목조동자상은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도난되었을 때 응진당에 함께 봉안되어 있었던 불패(‘南無釋迦牟尼佛’)의 바닥면에 1722년에 비구 단열과 청준이 조성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됨에 따라 1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주 청곡사는 878년에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고찰이다. 절에 대한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에 한차례 중창됐고 ‘신증동국여지승람’제30권에 “청곡사는 월아산 서쪽에 위치한다”고 기록돼, 16세기 전반까지는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두 차례의 중창불사를 통해 70여칸이 넘는 전각들을 갖추게 돼 진주목 동쪽의 거찰이 됐다고 전한다.
 

사진3) 청곡사 목조동자상, 조선 후기, 높이 74cm, 71cm. 필자 제공.
사진3) 청곡사 목조동자상, 조선 후기, 높이 74cm, 71cm. 필자 제공.
사진4) 청곡사 목조동자상(도난 이전 사진). 청곡사 제공
사진4) 청곡사 목조동자상(도난 이전 사진). 청곡사 제공

회수된 ‘청곡사 목조동자상’은 업경전(業鏡殿)에 지장보살삼존상과 좌우의 시왕, 판관, 사자 등 권속들과 함께 봉안되어 있던 것이다(사진3). 업경전은 그 예가 많지 않은 특이한 전각으로 보통 지장전 또는 명부전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도난되기 전에 10구의 동자상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어 대체적인 형상을 알 수 있다(사진 4).

이 가운데 회수된 동자상 2구는 높이 74cm, 71cm로 얼굴과 몸에 심한 균열이 생긴 상태였다. 손에 쥐고 있던 지물도 없어졌다. 도난 후에 개채 됐는데 얼굴과 손에는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있고 옷은 붉은 색과 청색으로 채색돼 있었다.

크지 않은 아담한 체구와 천진스러운 얼굴, 귀여운 신체 비례 등은 조선 후기 동자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쌍계 형태를 하고 있으나 옆으로 넓은 얼굴과 뚜렷한 눈매, 작은 입 등에서 조선 후기 동자상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각각 막대기와 연꽃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의 뒷면에도 봉안됐을 당시 위치를 보여주는 ‘右五’(우오), ‘右三(우삼)’이란 글자가 적혀있다.

청곡사 목조동자상은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업경전에 봉안돼 있던 1657년 조성 지장삼존상, 시왕, 범천 제석천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해 같은 시기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한때 많은 신앙을 받았던 청곡사의 동자상들이 도난된 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온갖 수난을 겪었지만 그것을 잘 견뎌 내고 2구가 돌아왔다. 나머지 8구의 동자상들도 언젠가는 모두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96호 / 2021년 8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